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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장선아(네이버 ‘책’ 분야 파워블로그) : 20년째 1000편이 넘는 독서록을 쓰고 있으며 아이를 키우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기뻐하는 평범한 아줌마.
독특한 소설이다. 신선한 내용과 구성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차치하더라도 이런 구성으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저자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1936년의 세계정세를 반영하면서도 풍자적으로, 심각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썼다는 사실이 굉장하다. 이 소설의 주축에 있는 도롱뇽이라는 생물이 인간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흥미로우면서도 인간이란 존재가 지배와 권력과 물질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재를 투영했을 때 소설 속의 세계가 낯설지 않는 건, 어쩌면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필연적인 필요에 의한 우리들의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이 아닐까?
2_윤성의 (S전자 마케팅팀 / 전 구글코리아 팀장) : 다양한 장르의 (나무에 미안하지 않은) 책을 좋아하며, 속도보다 깊이 있는 독서를 추구한다.
어렸을 적 <탐구생활>에서 봤던 혀의 지도, 가짜란다. 이럴 수가.단맛과 쓴맛과 짠맛을 감지하는 부위가 달리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혀의 모든 부분에서 전부 감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쓴 한약을 먹을 때 단맛만 감지한다는 혀끝으로 필사적으로 날름거리던 바보짓은 그만해도 되겠다. 이쯤해도 충분히 책을 펼친 보람이 있다 싶은데 이게 끝이 아니다.
대부분의 맛 연구는 혀에만 집중되었지만, 현대 과학은 이제 몸 곳곳에서 쓴맛을 수용하고 감각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비록 의식에 떠오르지 않고 하는 일도 불분명해 아직은 일종의 그림자 미각계의 일부라고 뭉뚱그려져 있지만, 상상만으로도 뭔가 짜릿하고 신비롭다. 입속에서 폭발적으로 번진 맛의 감각이 소화기관의 어둠 속으로 점차 번져나가고, 거기서 몸속 모든 곳으로 뻗어나간다. 몸 전체가 거대한 혀나 입이 되어 세계에 반응하면서 격렬하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느낌이라니.
거대한 화학적 혼돈이라 할 수 있는 식사 한 끼를 앞에 두고,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이제 인류의 역사와 진화에 대해 황홀한 상상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돈 버는 기계, 기업들은 경쟁을 좋아할까. 그럴 리가. 특허와 로비를 통해 잔뜩 몸을 불려 다른 기업이 감히 범접할 수 없도록 자신만의 성을 쌓아올리기를 시도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한 이익 추구 행위의 결과로 사회적인 총후생이 감소할 수 있으므로 정부가 시장의 관리 감독을 해주어야 한단 이야기도 있으나, 또 시장 대신 정부가 막대한 세금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며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비난도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돈도 실력이야, 부모를 탓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 한국에서 생각한다. 대체 대기업과 권력의 카르텔이 강고한 한국에서 공정함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눈먼 돈이 마구 투입된 정책적 지원 산업에는 누구의 세금이 투입되는가 말이다. 이제 사람들은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으며 시장 역시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이 구조적인 불평등을 교정할 경로나 방법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스티글리츠의 주장이다. 이로써 기회의 땅이라는 아메리칸드림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한국은 기회의 땅이었던 적이나 있었을까.
3_박영신(문학동네 편집장) : 문학동네에서 인문 사회 논픽션 분야 책들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재미있어 합니다.
전립선염에 걸린 중년의 기러기 아빠-대기업 부장이 병을 치료하던 와중에 알게 된 환희에 찬 새 세상, ‘드라이 오르가슴’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은 소설. 전립선염에 걸린 한국의 중년 남성이라는 상징을 놓고 우리는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그건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다. 책을 덮은 뒤 남는 것은 엉뚱한 음울함, 황량한 씁쓸함이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대한민국 시민 모두에게 있으나 행복이란 가치 안에는 ‘남들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라는 딱지만 수북할 뿐이다.
행복에 관한 한국적 지표들은, 한때는 소박한 꿈을 품었을지도 모를 이 땅의 모든 어른들을 ‘웃픈’ 배우들로 살아가게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혹은 척 팔라닉의 소설 <파이트 클럽>을 떠올리게 된다. 비굴해질 대로 비굴해진 한 소시민이 노이로제에 걸려 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테러리스트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다룬 <파이트 클럽>은 『자기 개발의 정석』과 정반대의 결론을 향해 치닫지만, 두 텍스트는 같은 곳을 찔러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가 거기 속한 인간들을 파편화하고 야성을 망각한 노예로 몰아가는 것이라면, 바뀌어야 할 것은 행복의 기준 혹은 그 사회 자체 아닌지. 순시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과연 헤어나올 수 있을까)에 어떤 모멸감을 느끼는 이라면(조금 우울해질 준비를 하신 후) 한 번쯤 읽어보시라고 추천한다.
“당신의 영혼은 상처받지 않았나요? 그렇지만 그런 아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통된 감각입니다, 그러니 조금 슬퍼도 괜찮습니다. 슬픔은 정상입니다”라고 말을 걸어오는 책이다.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주눅이 들 때가 있다. 왜 걸작인지도 모르겠고, 작품에 공감하려 애써도 왠지 억지스럽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에게만은 너무나 훌륭해 보이는 작품이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의 독특한 시각에 대해 스스로 대견해하기보다는, ‘아,내가 보는 눈이 정확하긴 한 걸까?’ 하며 다시 한번 ‘소심하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해준다. 사람마다 각자 서로 다른 내면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그러니 그 내면에 울림을 주는 작품 또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고. 오히려 역사교과서나 수학공식 암기하듯 예술작품을 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한다. 한결 마음이 가볍다. 우리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이 그렇게 얘기해주니 더더욱!
이 책이 건네는 이야기는 이렇게 우리가 겪는 감각적, 감성적 무력감이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또 극복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다. 뼈아픈 실연, 가까운 이의 상실, 꿈의 좌절, 가족과의 불화 같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하지만 나만 이런 슬픔과 고통을 겪는 거라고 느끼게 되는) 불행한 일들에 대체 어떻게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되풀이하는 실패와 그때마다 되풀이되는 나와 세상에 대한 원망. 이에 대해서도 알랭 드 보통은 역시,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을 통해 친절하게 보여준다.
4_이성원 (디노웍스 에디터) : 재미있는 스토리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며,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어 하루 24시간 책과 함께 살고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
우리 시대가 원하는 지향점을 이토록 정확하게 꼬집어낸 책이 있을까. 『개인주의자 선언』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에 물든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합리적 개인주의’를 통해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책이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는 자신만 생각하는‘이기주의’와 전혀 다르다. 사회가 문제를 당면했을 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개개인의 삶으로 돌아왔을 땐 개인의 삶과 생각이 존중되는 ‘합리성’이 핵심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살자.” 책이 말하는 삶의 모습엔,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향한 우리 시대의 열망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시대가 원하는 지향점을 이토록 정확하게 꼬집어낸 책이 있을까. 『개인주의자 선언』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에 물든 한국 사회를 비판하며, ‘합리적 개인주의’를 통해 한국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책이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는 자신만 생각하는‘이기주의’와 전혀 다르다. 사회가 문제를 당면했을 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개개인의 삶으로 돌아왔을 땐 개인의 삶과 생각이 존중되는 ‘합리성’이 핵심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살자.” 책이 말하는 삶의 모습엔, 합리적인 개인주의를 향한 우리 시대의 열망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7년의 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잊히지가 않는다.작가 정유정이 쏟아낸 강렬한 문장들은 단번에 나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문장이 가지는 힘만 좋았더라면 이 작품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진가는 강렬함 뒤에 놓인 ‘치밀함’에 있다. 인물과 사건이 얽혀가는 과정과 배경의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작가 정유정이 하나의 작품을 내놓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글을 쓰고 가다듬었는지 선뜻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7년의 밤』을 만난 이후로 너무도 당연하게 정유정 작가는 신작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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