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Book

세계경제대공황(1929)

오뉴 2013. 7. 18. 14:44

세계경제대공황(1929)

 
 
1. 20세기의 세계경제사

지구 위의 모든 나라들이 참가하여 이룩하는 세계경제는 20세기에 큰 시련을 겪었다. 공산주의권의 탄생과 멸망에 의한 세계경제의 분열과 단일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한국전 및 월남전, 1929년의 세계대공황에 버금가는 1974-75년의 세계대공황과 아직도 계속되는 장기불황.

1914-19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거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낭비하면서 영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 (팍스 브리타니카)를 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팍스 아메리카나)로 대체했고, 1917년 11월의 러시아혁명으로 세계경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사회주의 세계경제로 양분되고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1929년 10월 뉴욕증권시장의 주가 폭락은 20세기의 제1차 세계대공황으로 발전했는데, 주요 선진자본주의국들(또는 제국주의국들)은 자기 나라의 시장부족과 실업증대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와 종속국을 묶어 자급자족적인 블록경제를 형성함으로써 블록 상호간의 무역거래를 사실상 중단시켰다. 이리하여 세계시장은 점점더 축소했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 경제의 회복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기반으로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침략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식민지를 잃고 전쟁배상금을 물고 있던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등장하여 '생활권'을 확대하기 위해 대외침략을 감행했다.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와 종속국을 거의 가지지 않은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공공투자사업과 노동조합 합법화를 통해 국내시장의 확대를 도모했다. 그렇지만, 미국이 1929년 공황에 뒤이은 장기불황을 극복하게 된 것은 1941-45년의 제2차 세계대전 덕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거대한 군수산업(또는 무기산업)은 판매시장이 없어 불황에 빠졌고 이리하여 미국경제가 불황에 빠졌는데, 1950-53년의 한국전쟁이 미국경제의 회복과 패전국 일본의 경제 재건에 크게 기여했다.

1950-70년은 이른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황금시대로 공산권과의 냉전과 열전 속에서도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지휘하는 국제기구(예: IMF, IBRD, GATT)가 기능했고, 선진자본주의국에서는 복지제도가 확대했고 (즉 국민들에게 교육과 의료의 혜택이 확대되고 실업수당과 연금이 제공되고 저소득층에게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노동조합의 권리가 확장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 야기한 석유가격의 폭등은 1974-75년에 20세기의 제2차 세계대공황을 야기했는데, 1999년 말까지 세계경제는 아직도 그 공황에 뒤이은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별히 지적해야 할 것은 선진자본주의국들이 국내의 저성장과 실업증대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출을 증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장기불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적으로는 복지제도를 해체하고 긴축정책을 실시하며 노동임금을 삭감하고 고용불안을 조장하며 빈부격차를 확대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당연히 국내시장을 축소하는 것이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무역과 외환 및 자본의 자유화를 모든 나라에 강요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후진국들의 경제발전을 저해하고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증가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1970년대와 1980년대 및 1990년대에 세계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던 아시아가 1997년에 공황에 빠졌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세계경제의 성장을 주도하던 일본이 1990년에 공황에 빠진 것이다.

물론 20세기를 마감하는 1990년대에 사회주의권 또는 공산주의권이 붕괴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나라들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하게 되었고, 세계경제가 하나로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공산주의권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혼란에 빠져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세계경제의 장기불황은 더욱 연장되고 있다.

2. 경기변동의 주요 개념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개별 자본가(산업자본가든 상업자본가든 은행자본가든)가 자기 자신의 장래 예상에 따라 모든 투자를 스스로 결정한다. 따라서 어느 산업부문에서 큰 이윤을 얻고 있다든가 얻을 수 있다고 예상하면 그 부문으로 자본이 집중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그 부문의 기업 수가 증가하고 설비 규모가 확장하면서 노동자들의 수도 증가한다. 그런데 어느 중요한 산업부문이 설비 규모를 확장하고 고용을 증가한다면, 경제 전체도 호황을 맞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산업부문은 다른 산업부문들로부터 기계류와 원자재를 구입해야 하므로 생산재(기계류와 원자재)를 생산하는 다른 산업부문들의 생산과 고용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아 소비재를 구입하므로 소비재산업의 생산과 고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호황이 지속되면, 모든 부문의 개별 자본가들은 앞으로도 계속 상품이 잘 팔릴 것으로 믿어 투자를 경쟁적으로 확대하기 때문에, 기계류와 원자재의 가격 및 임금수준은 크게 상승하면서 생산재산업과 소비재산업은 벼락경기(boom)를 맞이한다.

그러나 생산 설비의 확장에 발 맞추어 판매시장이 확대하지 않으면, 상품들이 팔리지 않아 재고로 남거나 낮은 상품가격으로 체화를 처분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총수입이 감소하고 이윤율이 저하한다. 결국 과잉투자와 과잉설비가 발생한 셈이고, 이윤율의 저하로 다수의 산업기업이 도산하게 된다. 이것이 산업공황이다.

중요한 산업기업의 도산은 주가를 폭락시켜 증권시장을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주식시장 공황을 야기하며, 금융기업(또는 금융기관)의 대출 중 부실대출의 비중을 증가시켜 금융기업의 수익성과 신뢰도를 저하시키고 일부의 금융기업을 도산시키게 된다. 이것이 은행공황이다. 이러한 금융시장의 혼란 가운데 금융기업은 자신의 도산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출을 삼가기 때문에, 경제전체에서는 현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을 지른다. 이것이 신용공황 또는 화폐공황이다. 산업기업뿐 아니라 금융기업을 포함하여 경제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주가는 폭락하고 금리는 폭등하며 산업생산지수는 격감하고 실업자가 격증하게 된다.

호황의 마지막 국면인 벼락경기를 뒤이어 갑자기 나타나는 공황국면은 대체로 산업공황의 시작-->신용공황, 화폐공황,은행공황-->산업공황의 심화라는 경로를 거치게 된다. 그러면 '경제위기'(economic crisis)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경제가 벼락경기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에 부닥쳐 공황으로 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국면에 들어가는데, 바로 이 국면이 경제위기다. 그러나 공황(panic 또는 crash)은 실제로 경제가 갑자기 혼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국면을 가리킨다.

공황 국면에서는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새로운 생산방법, 새로운 상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노동조직, 새로운 금융조직, 새로운 국제협약 등에 힘입어 경제가 다시 성장하는 회복 국면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불황 국면이 계속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는 호황(prosperity)-->벼락경기(boom)-->경제위기(economic crisis)-->공황(panic, crash)-->불황(depression)-->회복(recovery)-->호황이라는 국면을 거치면서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호황에서 다음 번의 호황까지의 주기가 몇 년이 될 것인가는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1974-75년에 폭발한 세계대공황 이후 세계경제는 1999년 말까지도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3. 1974-75년의 세계대공황

1974-75년 공황에서 각국의 공업생산 감소율은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 이후 가장 컸다. 미국의 공업생산은 1973년 11월-1975년 4월의 17개월 동안 13.8 % 감소했고, 서독은 1973년 12월-1975년 5월의 26개월 동안 12.3 % 감소했으며, 영국은 1973년 10월-1975년 5월의 19개월 동안 11.0 % 감소했고, 일본은 1973년 12월-1975년 2월의 14개월 동안 21.4 % 감소했다.

이 공황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흔히들 오펙(OPEC. 제3세계 주요 석유수출국들의 카르텔)이 1973년 10월-1974년 1월에 석유가격을 배럴당 3달러에서 11.65달러로 4배 인상했기 때문에, 공황이 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황의 방아쇠에 관한 이야기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총알이 폭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총알을 넣지 않고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봐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가 폭등 이전에 이미 세계경제를 공황에 빠뜨릴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었으며, 유가 폭등은 공황을 촉발했을 따름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 1970-71년의 경기 후퇴

이윤율의 추이를 살펴보면, 주요 선진국의 기업 전체와 제조업의 이윤율은 대체로 1960대 중반의 최고 수준으로부터 1973년에는 거의 30 %나 저하했다. 미국의 예를 보면, 기업 전체의 이윤율은 1966년에 22.3 %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는데 1973년에는 14.8 %로 폭락했고, 제조업의 이윤율도 1966년에 34.9 %로 최고 수준을 기록했지만 1973년에는 22.5 %로 폭락했다. 이윤율이 자본가의 투자능력과 투자의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윤율의 폭락은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70-71년의 경기 후퇴가 이것을 가리킨다.

이윤율의 저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 때문인데, 첫째로 주요 산업들(예: 섬유산업,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석유화학공업, 철강업, 가전공업)이 수요 감퇴, 경쟁 격화, 저생산성, 과잉설비 등의 문제점에 부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오염이나 제품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 가면서 기업들은 수익을 낳지 않는 설비에 투자해야만 했고, 노동자들은 포드주의적 단순반복노동에 대해 무단결근 등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둘째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격화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5월 혁명 이래 임금수준이 대폭 상승했고, 이탈리아에서는 1969년 가을부터 북부공업지대에서 주변노동자들(이탈리아의 남부와 중부에서 이민온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임금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사회복지제도의 개선과 확대를 추진했다. 보건과 교육을 위한 지출, 그리고 소득보조(실업자에 대한 실업수당, 퇴직자와 노령자에 대한 노후연금, 저소득층에 대한 각종 보조) 등 사회복지비는 1960-70년에 국내총생산의 증가율보다 더욱 크게 증가했다. 이리하여 사회복지비/국내총생산의 비율은 1970년대 초 프랑스 22.4 %, 서독 22.1 %, 영국 18.2 %, 미국 17.1 %, 일본 9.9 %이었다.

셋째로 국제통화제도가 불안정적이어서 외환투기나 골드러쉬(gold rush.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대소동)가 자주 발생함으로써 국제거래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0년대 중반 이래 수입초과, 대외원조, 베트남전쟁, 대외투자 등으로 대규모의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기 때문에, 세계화폐로서의 달러에 대한 신뢰도(또는 신인도)가 하락하여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대소동이 여러 번 일어났다. 결국 닉슨은 1971년 8월 15일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는 제도를 폐기한다고 선언했고, 1973년 3월 모든 나라는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2) 1972-73년의 투기적 벼락경기

각국 정부는 1970-71년의 경기후퇴를 해소하기 위해 재정금융의 확장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1972년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 연도여서 미국 정부는 확장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확장 정책 때문에 무역수지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독과 일본에게 마르크와 엔의 평가절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과 일본은 평가절상이 자국 상품의 국제경쟁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평가절상에 반대하고, 그 대신 무역 흑자로 들어오는 달러와, 환율변동을 노려 들어오는 투기성 자금(hot money)을 빨리 사용해 버리려고 했다. 대내적으로는 공공사업을 미리 집행했고, 금리를 계속 인하하여 투자를 촉진했으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대외적으로는 해외투자를 적극 장려했고 원자재를 대규모로 수입하여 비축하게 했던 것이다.

재정금융의 팽창 정책으로 이자율이 낮고 대출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농산물과 광산물의 원자재 가격이 공급 부족으로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1972-73년에는 세계적인 투기 붐이 일어났다. 커피, 설탕, 목재, 알루미늄, 곡물, 금, 골동품의 가격이 폭등했으며, 또한 토지, 건물, 주식에 대한 투기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다시 말해 제조업 등 산업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투자가 이윤율의 저하로 정체함에 따라 금융기관의 방대한 여유자금이 원자재, 부동산 그리고 주식의 매입에 대부된 것인데, 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 짐으로써 가격은 급등했다. 일본에서는 1972년 7월-1973년 3월에 목재 가격은 2.24 배, 콩 가격은 4.76 배, 모사 가격은 2.08 배, 생사 가격은 1.94 배, 면사 가격은 1.9 배 폭등했고, 도쿄의 주가지수도 1971년 1월의 148.05에서 1973년 1월에는 422.48로 급상승했으며, 토지 가격도 1970년 3월-1973년 3월에 64 %나 상승했다.

3) 1973년 10월-1974년 1월의 유가 폭등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오펙은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중단시키기 위해 석유수출의 삭감과 국별 수출 금지(예컨대 미국에 대한 수출 금지)를 결정했으며, 석유 가격을 4 배나 인상했다.

유가인상이 1974-75년 공황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가인상 때문에 선진국의 구매력이 오펙으로 이전함으로써 선진국에는 유효수요가 부족하게 되어 생산이 격감하고 실업이 격증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물론 오펙이 유가인상을 통해 선진국과 후진국으로부터 대규모의 달러를 흡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달러를 오펙의 금고 속에 넣어 둔 것은 아니었다. 오펙의 각국 정부는 야심적인 개발계획을 세워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생산재와 소비재를 수입했고, 나머지의 잉여달러는 주로 선진국의 은행에 예금했다. 선진국의 은행은 예금으로 받아들인 석유달러를 주로 발전가능성이 높은 후진국에 대출함으로써 선진국으로부터 종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재와 소비재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등이 외채위기에 빠진 것도 1970년대 중반 이래 선진국의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석유달러를 차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가인상-->오펙으로 구매력 이전-->선진국의 구매력 부족-->생산의 격감=1974-75년 공황이라는 논리는 옳지 않다.

유가인상이 세계경제에 미친 영향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유가인상은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에 먼저 타격을 가하고 나아가서 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석유를 에너지나 원료로 사용하는 산업은 유가인상에 따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도산하거나 생산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이 산업에 기계나 원자재를 공급하던 산업들도 제품의 판로가 막히자 도산하게 되었다. 둘째로 유가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함에 따라 각국 정부가 1974년 봄부터 긴축정책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 긴축정책 때문에 모든 투기가 몰락하게 되어 신용공황과 은행공황 및 산업공황이 심화했다.

4) 공황의 전개과정

1972-73년의 벼락경기로 원자재, 부동산, 주식의 가격이 폭등하고, 더욱이 유가까지 폭등하여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행했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1973년 말부터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석유를 원료나 에너지로 사용하는 산업이 유가인상으로 타격을 받아 경제 전체가 판매 부진과 과잉생산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투기꾼들이 도산하게 되었으며 이들에게 대출한 금융기관들도 도산했다.

1974-75년의 공황은 상업, 부동산업, 건설업의 파산에서 시작했다. 또한 석유가격이 폭등하자 자동차 수요가 격감하여 자동차 공업이 타격을 입었으며, 이어서 섬유, 전기기기, 건축자재, 석유화학공업이 타격을 입었다. 철강, 가구공업은 1974년 여름까지는 공급부족 상태이었으나 곧 공급과잉으로 전환했으며, 석탄, 석유, 곡물분야는 상당한 기간 동안 공급부족 상태였다.

각국의 공업생산지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인플레이션은 계속 진행했다.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196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생산저하율, 생산저하기간,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진행속도에서 1974-75년의 공황은 더욱 악화된 형태였다. 왜 이렇게 악화되었는가? 첫째로 1973년 말의 긴축정책으로 다수의 기업이 도산하고 주요 금융기관까지 도산 위기에 빠지자, 정부는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독과점기업들이 석유가격과 원자재가격의 상승을 제품가격에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로 노동조합은 실질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임금의 인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1976-77년부터 상당히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완제품과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고, 기업들이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가격인하 경쟁을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은 실업 증대로 임금인상을 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4-75년 공황은 실업을 격증시켰다. 한편으로는 생산이 감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동절약적인 생산방법을 도입하고 노동조직을 개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1950-73년의 장기번영기에 대규모로 취업한 부녀자, 청소년, 소수인종그룹, 외국노동자들은 쉽게 해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복지비를 축소하자, 학교나 병원이나 노동부에 고용되어 있던 봉급생활자들이 대규모로 실직했기 때문이다.

4. 불황극복전략=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

1974-75년의 공황과 그 뒤의 장기불황을 겪는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래의 국민적 합의(즉, 혼합경제, 완전고용, 복지국가)를 무너뜨리는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가 나타났는데, 이 사상체계가 1999년 말까지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보수주의는 1979년 5월에 집권한 영국의 새처 정부가 처음 정책적으로 실시했고, 1981년 1월에 집권한 미국의 레이건 정부도 마찬가지의 노선을 채택했다. 영국의 보수당은 1997년 4월까지 집권했고, 미국의 공화당은 1992년 12월까지 집권했지만, 그 뒤의 노동당이나 민주당도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회민주당도 신자유주의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줄여야 하며, 따라서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국영기업은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고용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경쟁력을 향상시켜 수출을 증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복지국가의 해체

정부에게 사회복지비의 지출을 삭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 의거하고 있다. 첫째로 국민의 조세부담을 줄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고소득층에 대한 조세를 삭감함으로써 고소득층의 근로의욕, 투자의욕을 자극하려고 했다. 둘째로 사회복지비 지출로 실업자가 실업수당을 받거나 소득보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본가의 지휘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규율을 요구하고 자본의 독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비 지출을 삭감해야 한다. 셋째로 사회복지비 지출은 노동생산성의 향상이나 국제경쟁력의 강화, 기업의 수익성 개선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로 사회복지비의 지출 확대로 학교, 병원, 법률상담소, 양로원, 탁아소 등이 점점 비영리 공공기관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민간자본의 영리활동 분야가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업자가 급증했고 특히 청년의 장기 실업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회복지비의 지출을 삭감하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2) 국영기업의 민영화

신자유주의는 국영기업과 공익사업을 민간에게 매각하고, 공공부문의 보조기능(예: 세탁, 취사, 청소, 쓰레기 수거)을 민간기업에 맡기고 있다. 그런데 민영화는 수익성이 있는 국영기업이나 공익사업에 국한될 수밖에 없고, 또한 정부가 수익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민간에게 팔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민영화의 이익으로 선전한 경쟁 강화나 기술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영화는 정부가 소유했던 독점기업(예: 철도, 통신, 가스, 전기, 수도, 항공)이 민간소유로 전환된 것뿐이며, 민영화한 기업은 수익성의 원리에 따라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조직을 개편하며 노동강도를 높이고 생산물이나 서비스의 질을 낮추면서 가격을 인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3) 세계시장의 개척

장기불황이 계속되면서, 생산재에 대한 수요는 점차 줄어들고, 실업의 증대와 임금수준의 저하로 소비재에 대한 수요도 줄어들고 있는데, 정부까지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재정금융의 긴축정책을 실시하기 때문에, 국내시장은 크게 축소되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국가경쟁력을 강화하여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기업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해 외환관리규정을 철폐하고 자본수출의 자유화를 실시했다. 또한 후진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에게도 무역과 외환 및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요구함으로써, 결국에는 우루과이 라운드를 타결하고 WTO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리하여 선진국의 기업들(산업기업이든 금융기업이든)은 세계 각국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최대의 이윤을 획득하고 있다. 이른바 자본의 세계화(globalisation of capital)가 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나라들이 국가경쟁력을 강화하여 세계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은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책이다. 첫째로 새로운 기술을 최초로 발명하여 실용하는 기업은 세계시장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지만, 어느 한 기업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항상 최초의 기술개발국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임금비용의 저하를 도모하는데, 이것은 노동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고, 또한 국내시장을 더욱 축소함으로써 세계시장의 규모를 점점 더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보다는 임시직을 증가시키고, 시간제 노동자나 파견노동자를 증가시키는 것은 임금비용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고용의 안정성을 파괴하게 된다.

5. 21세기 전망

세계자본주의는 1974-75년의 공황 이래 1999년 말까지 장기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자본은 세계적 팽창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많이 제거했다. 각국 정부는 무역거래와 외환거래 및 자본이동을 자유화했고, WTO에서는 정부의 산업지원 철폐, 정부구매 입찰에 외국인 참가 허용, 지적 재산권의 보호, 독과점 규제나 환경 규제나 노동법의 균일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이 세계 전체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최대의 가치증식을 도모하는 것이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오히려 강화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혁명에 힘입어 화폐자본은 순식간에 대규모로 이동하기 때문에, 화폐자본가의 이익을 훼손할 위험성이 있는 나라는 외환위기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어느 한 나라가 고용을 증대시키기 위해 재정확장정책을 실시하는 경우, 금리를 인하하거나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화폐자본가들은 곧 그 나라로부터 자금을 빼내기 때문에, 외환이 부족하게 되고 환율이 폭등함으로써 고용을 증대시킬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각국 정부의 정책이 자본의 세계화에 따라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 이동의 자유화에 의거해 대규모의 자본이 한꺼번에 유출함으로써 1997년 아시아 각국은 외환공황과 경제공황을 겪었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은 1987년 10월 19일의 뉴욕증권시장 공황에서도 볼 수 있다. 이날 다우공업주가는 22.6 % 폭락했는데, 10월 14-19일의 나흘거래일 동안 31.9 %나 폭락하여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 공황을 훨씬 능가했다. 이러한 뉴욕증권시장의 격변에 영향받아 런던과 도쿄의 증권시장 주가도 나흘 동안 각각 22 %와 18 %나 폭락했으며, 홍콩의 증권시장은 10월 20-26일 폐쇄되었다. 왜 이러한 공황이 발생하는가? 주식 소유가 기관투자자들(증권회사, 은행, 투자신탁, 보험회사, 연금공단)에 집중하고 있고, 주식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대한 정보가 세계적인 규모로 조직적으로 신속하게 수집 전파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거대한 기관투자자들이 거의 동시에 주식을 팔아치우려 한다면, 주가가 폭락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관투자자들이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 증권시장에 분산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증권시장의 주가 폭락은 자연히 런던과 도쿄시장에서도 주가를 폭락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계경제에서 자본이동의 자유화는 주식시장 공황과 외환공황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이동을 통제하자는 주장이 신자유주의자들(예컨대 IMF)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21세기에는 자본이동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큰 토론거리가 될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 경향이 강화되면서 노동자계급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첫째로 자본은 세계 전체를 상대로 최적 입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므로, 고용의 불안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본은 세계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나, 노동은 법적인 규제나 문화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세계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후진국의 노동자들은 선진국 노동자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자본주의적 발전을 통해 조그마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본의 세계화는 세계 전체의 노동자계급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넷째로 자본의 세계화에 따라 국민국가의 경제정책은 어느 정도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노동자계급이 자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정책을 획득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국민국가의 힘을 능가한다든가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있다는 주장은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개입을 축소하면서 자본의 세계화를 추진하고 자본의 이동성을 증대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과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국민국가는 자본의 가치증식 조건(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어느 때는 사회민주주의적으로 되고 또 다른 때는 신자유주의적으로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각국 경제는 물론 세계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에는 신자유주의가 뒤로 물러가면서 정부가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국가경쟁력을 높혀 세계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소득과 고용을 증가시킨다는 신자유주의적 전략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모든 나라들이 국내지향적인 발전을 도모하면서 경제를 민주적으로 평등주의적으로 환경친화적으로 운영하는 전략을 수립하여 주민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한다.

출처: http://blog.daum.net/leftover/3797565